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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영웅 소개, 뮤지컬 넘버, 안중근 의사

by I'm a 쿼카 2023. 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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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영웅은 독립운동가인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1년을 다룬 동명의 뮤지컬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영화 영웅 소개

영화 영웅은 2022년 12월 21일에 개봉을 했다. 주인공 안중근 역할은 동명의 뮤지컬에서도 같은 주인공을 맡은 정성화 배우가 열연을 했다. 1909년 10월 하얼빈역에서 일본의 정치가인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뒤 일본 법정의 사형 판결을 받고 순국한 안중근 의사가 거사를 준비하던 때부터 죽음을 맞이하던 순간까지 잊을 수 없는 마지막 1년을 그린 영화다. 뮤지컬 영화라는 장르로 배우들이 노래를 부르며 대사를 전달한다. 어머니 '조마리아'와 가족들을 남겨둔 채 고향을 떠나온 대한제국 의병대장 안중근과 동지들이 함께 네 번째 손가락을 자르는 단지동맹으로 조국 독립의 결의를 다지며 피로 맹세한다. 이토 히로부미의 야망은 대한민국을 넘어 중국 그리고 동남아까지 식민지배를 하겠다는 계획이었고, 이를 막기 위해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기로 한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오랜 동지와 독립군을 재회하여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와 회담을 하기 위해 하얼빈을 찾는다는 독립군의 정보원의 일급 기밀을 접수하여 거사를 계획하기로 했다. 드디어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 도착한 일본의 정치가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안중근은 방아쇠를 당긴다. 이토 히토부미를 암살하고 현장에서 체포된 안중근은 전쟁 포로가 아닌 살인의 죄목으로 조선이 아닌 일본 법정에 서게 되고 자신은 죄가 없으며 누가 죄인인지 묻는 것으로 영화는 끝이다.

영화 영웅 포스터

영화 영웅의 뮤지컬 넘버

단지동맹은 안중근 의사가 소규모 결사대와 함께 눈 덮인 자작나무 숲에서 왼손의 네 번째 손가락을 자르며 결의를 다지는 장면에 나왔다. 

조선의 마지막 궁녀이자 독립군 정보원인 설희 역을 맡은 김고은 배우는 '당신을 기억합니다 황후마마여, 그대 향한 나의 꿈, 내 마음 왜 이럴까'를 불렀는데 가수 못지않은 고운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 재발견을 하게 되었다. 뮤지컬 원작에는 없는  '그대 향한 나의 꿈'은 오직 극장에서만 확인할 수 있는 새로운 넘버로 특별함을 더했다.

'누가 죄인인가'는 재판을 받으며 일제 강점기에 받은 핍박과 억압 부조리를 나열하며 나라를 위해 싸운 이들 벌할 자가 과연 누구인지 묻는 강렬함이 느껴지는 넘버였다.

조마리아 여사님은 배우 나문희가 연기하며 '사랑하는 내 이들, 도마'를 부르셨다. 사형을 구형받은 아들을 위해 손수 수의를 만들고, 배넷저고리를 부여안고 오열하시는 모습에서 눈물샘이 터지고 말았다. 

안중근 역할의 정성화 배우가 부르는 장부가는 13번이나 라이브로 부르며 거의 실신하기 직전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뮤지컬 영화를 위해 배우들은 후시녹음이 아니라 70% 현장에서 라이브로 불렀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맘마미아, 레미제라블, 라라랜드 같은 뮤지컬 영화를 좋아하는데 영화 영웅은 역사적으로 암울한 시기였던 만큼 그 분위기가 무겁게 느껴졌다. 

안중근 의사

안중근은 1879년 9월 2일 황해도에서 태어나 1910년 3월 26일 32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점령하고 있을 때 독립을 위해 항일운동을 펼치던 독립운동가이다.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여 30분 만에 사망하게 되었고, 안중근은 현장에서 체포가 되었다. 원래대로라면 제3 국인 러시아에서 공정한 재판을 받아야 했지만, 일제의 압력에 의해 일본 고등법원으로 송치되어 재판을 받게 된다. 1910년 2월 14일 마나베 쥬조 재판장은 안중근에게 사형선고를 내렸고, 항소하면 조선의 지사가 목숨을 구걸했다는 인상을 주지 않겠느냐는 뜻에 동의해 항소는 포기했다고 한다. 수감생활에서 서예와 동양평화론 집필에 몰두하였고, 3월 26일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안중근은 대한의군 참모중장 신분으로 총살형을 일제에 요구했으나 일제에서는 테러리스트로 간주해 교수형으로 집행하였다. 유언으로 자신의 유해는 하얼빈 공원에 묻었다가 고국이 해방되면 그때 고국의 땅에 묻어달라는 말을 남겼다. 안중근이 순국한 후 두 동생이 유해를 인수하기 위해 찾아왔지만, 일본 당국은 안중근 의사의 묘지가 독립운동의 성지가 될 것을 우려해 끝까지 넘겨주지 않았다. 우리나라는 1945년 8월 15일에 일본의 통치에서 벗어났지만 지금까지도 안중근의 유해의 행방을 알 수 없어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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